퇴사한지 벌써 두 달을 꽉 채웠다. 첫 달에는 디톡스와 자유로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행복한 달이었다면 두 번째 달에는 차츰 스트레스프리 라이프에 적응이 되어가는 기간인가보다. 그래서인지 조금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다시 다니고 싶어진 것은 아니고.
회사를 다닐 땐 '회사다녀'라는 한 마디가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를 심플하게 대변했다.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진담으로 들릴 만큼 나의 매일매일은 부산스러운데 '나 요즘 OO해!'라고 정의되지 않는다는 건 묘한 씁쓸함이 있다. 이번 달은 뭘 하며 보냈는지 이번 달도 적어본다.
1. 혼자 맛있는거 먹으러다녀
혼자 놀아서 제일 슬픈 건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러갈 동반자가 없다는 것이다. 카페나 전시같은 건 얼마든지 혼자 가도 좋지만 말이다. 그리고 혼자 식당에 가면 아무래도 환영받지 못한다. 제일 구석자리나 인기가 없는 자리로 안내해주고 내가 앉고 싶은 자리를 가리켜면 예약석이라고 둘러댄다. 비싼 음식을 주문해도 대우는 비슷했다. 그리고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직원들끼리 큰 소리로 떠들기도하고. 아무튼 혼자 다녀서 서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란 말씀.
2. 짝꿍이랑 맛집 도장깨러 다녀
혼자 놀기 지쳐서 계속 징징거렸더니 짝꿍이 가끔 휴가를 내지르고 나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녀줬다. 회사에 쏟는 에너지가 없으니까 내 활동반경보다 조금 더 넓게 움직이는게 가능하다. 이참에 투두리스트에 있는 식당들 싹 클리어해야지. 지금까지 어디어디 깼냐면 말이죠.
필동면옥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성시경아저씨 먹을텐데 보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왔다. 제육은 편차가 심하다더니 나는 잘못된 제육을 만났다. 제육은 역시 장충동 평양면옥이 짱이다!!! 육향이 진하고 간간한 육수였고 면은 평양면옥이나 우래옥 순면에 비해서 좀 더 쫄깃 질깃한 면이다. 면두께는 평냉인데 쫄깃함을 생각하면 함냉같은... 비빔이 더 맛있을 것 같은 면이다.
아키비스트
서울 3대 그런거 누가 정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 아인슈페너가 서울 3대라는데 맛있는 아인슈페너는 맞다. 크림이 단단한건지 커피가 덜 뜨거운건지 모르겠지만 따뜻한 아인슈페너를 주문했는데도 크림이 꽤 오랜 시간을 견뎌준다. 그래도! 내 ㅁㅐ음 속 일등은 밀로커피로스터스의 비엔나커피. 아키비스트는 공간은 작지만 세련되었고 솔드아웃 천지지만 디저트도 있긴 있고 운치있는 동네에 위치하고 있어서 또 오고 싶긴 하다. 근데 웨이팅이 너무 심해서 과연 또 올 수 있을지...
7.8 막걸리 안국점
여긴 내가 원래 좋아하는 막걸리집이다. 늘 을지로 본점만 가봤는데 짝꿍이 을지로점의 타이트한 공간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안국점으로 와봤다. 처음 왔는데 역시 7.8답게 꽁꽁 숨어있다^^^... 늘 먹는 바질감자전은 꼬릿한 햄의 맛이 있어서 내추럴와인이랑 먹고 싶다. 7.8의 베스트셀러인 그래그날 막걸리는 가볍고 탄산이 톡톡 튀는 맛이다. 느린마을 막걸리랑 비슷한 듯. 가야 막걸리는 뭔가 속이 빈 듯한 공허함이 있어서 다신 안 먹을 것 같음...
악어떡볶이
드디어 와봤다! 악어떡볶이! 떡이 갓뽑은 것처럼 말랑하고 맛있다더니 진짜다 진짜야! 떡이 진짜 쫄깃 말랑 부드러워서 진짜 갓뽑은 가래떡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떡과 오뎅2개도 먹어봤는데 국물이 딱 우동국물 맛이다. 튀김류는 맛 자체는 평범한 맛이지만 깨끗한 기름에 튀기신 느낌이 팍팍 난다. 순대는 그냥 순대. 순대 대신 김밥을 시켜볼걸!
다음 달에도 도장깨기는 계속 된다....!
3. 골프도 치러 다녀
이번 달에는 두 번의 라운딩을 다녀왔다. 이제는 돈이 없으니까 가을골프까지만 불태우고 차츰 줄어들게 될 예정이다. 내 골프로그의 미래가 어둡네...? 어쩜좋아....
첫 번째는 재방문한 클럽모우
아래 링크 건 포스팅은 지난번에 다녀왔을 때 적은 것이고 그 아래 사진은 이번에 찍은 것이다. 정말 환상적인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던 날씨다. 그런데 사진 찍는 사람은 죽을 뻔 했다^^^... 전날 비가 많이 온 뒤라 숲 전체가 엄청나게 습한 상태였는데 여기에 한 여름의 햇볕이 내리 쬐니까 그 습도가 마치 그늘없는 열대우림 같았다. 기온보다 무서운게 습도라더니. 정말 죽을 뻔.
두 번째는 처음 가본 스카이 72의 레이크코스
이 날은 생각보다 선선하게 시작해서 역시 찐만두 체험으로 끝났다. 여긴 이번에 다녀온거라서 따로 자세한 포스팅이 있으니까 참고!
4. 돈 써서 아프고 돈 써서 낫고
골린이라면 다들 한 번씩 아프게 마련이죠? 골프를 치는데 테니스엘보가 (왜) 온 나는 정형외과 대신 한의원을 선택했다. 내가 가본 우리동네 정형외과들은 양아치라서 보나마나 체외충격파 얘기나 해댈 게 분명해가지고... 아무튼 침 맞고 손목을 덜 쓰려고 노력했더니 확실히 좋아졌다. 비싼 돈주고 레슨받고 라운딩가고 또 한의원에서 침을 맞는 아주 사치스러운 한 달이었다...
그리고 스포츠테이핑한대로 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라운딩 중간에 선크림을 2번이나 더 발라가며 사수했는데도 탄겁니다. 누가 선크림을 바르면 자외선이 차단된다고 했냐! 선크림은 자외선을 막을 수 업따!
5. 공원 다니기에 좋은 계절
골프덕분에 땀흘리기 싫어하던 내가 야외를 돌아다니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벌레와 불편한 잠자리가 싫어서 캠핑은 꿈도 꾸지 않는 나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 잔디밭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로는 여기저기 공원을 다닌다. 아예 헬리녹스 의자도 샀다구!
6. 건강하게 먹기는 어떻게 됐냐면
음 지난 달보다는 확실히 레토르트를 많이 사는 것 같긴한데...그래도 성분보면서 사는 건 유지하고 있다. 네니아랑 명인명촌 제품들이 성분이나 재료가 좋은 제품이 많은 것 같다. 반조리제품인데 MSG 조차도 들어가지 않았다니!
이거 현백에서 산 명인명촌 고추장 불고기인데 강추다! 안 짜고 안 맵고 안 달고 야채없이 고기만 1인분씩 2팩 들어있다!
마가린과 쇼트닝없는 디저트로는 나폴레옹의 쇼콜라비스큐슈니탱 추천. 내가 먹어본 모든 초코중에 제일 고오오오오급진 맛이다. 후기에 누가 한 자리에서 백개먹을 수 있다고 썼던데 삽가능입니다.. 아무튼 이걸 시작으로 나폴레옹에서 나오는 모든 슈니탱을 먹어보고 싶은데 롤케익 정도 크기에 25,000원선이라서 도전 불가. 후.
7. 혼자 전시 보기
이달의 전시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안드레아 거스키전. 처음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사진을 보면 지금의 작품들과는 큰 간극이 느껴진다. 등산객 사진은 꽤나 평범한 산 사진이었는데 그 속에 축소되어 담긴 인간의 모습에 집중한 거스키는 그 방향으로 자신의 작품을 발전시켰다. 그렇게 발전을 거듭하면서 유명한 아마존이나 99센트 작품들이 탄생한다. 이 작품들은 거대한 사진 속의 작은 개별 요소들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동시에 강조한다. 나도 나의 별자리를 찾았으면.
8. 이달의 넷플릭스 추천작은 '샌드맨'
판타지물을 계속 계속 보는 중에 발견한 샌드맨. 홍보영상을 보고 얄팍한 청소년 SF물 정도로 생각했는데, 웬걸 그래픽부터 스토리텔링, 연출까지 최고다. 샌드맨(Sand man)은 이빨요정(Tooth fairy)이나 잭프로스트(Jack frost)처럼 귀엽고 친근한 요정인데, 이 샌드맨을 그리스 신화와 묶어서 아주 서사적으로 풀어버렸다. 연출과 그래픽이 훌륭한데다 배우들의 비주얼이 진짜 그리스신화에서 튀어나오게 생긴 사람이 많아가지고 가아아끔 날 창피하게 만드는 설정이나 분장이 등장해도 금방 넘어갈 수 있다. 찾아보니까 그래픽노블의 명작으로 꼽히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을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지난 달과 마찬가지로 이번 달에도 무지개를 봤네. 그런데 이번 무지개는 다소 인공적... 처음에 마음먹었던 백수기간이 3개월인데 두 달이 지난 지금. 과연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니라면 도대체 뭘하고 싶고 뭘 할 수 있는지 고민이 많아진다. 그냥 백수기간을 6개월쯤으로 늘ㄹ....는건 안 되겠지? 안 될까? 안 되지? 안 되나? 아니? 네? 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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