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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잘조잘 나의 하루

퇴사 한 달, 어떻게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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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지 벌써 1개월이 지났다. 빠르게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던 한 달. 특별히 대단한 걸 하면서 보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달을 뭘하며 보냈는지 가볍게 짚어보련다.

1. 돌아갈 날이 두렵지 않은 제주 여행

시간이 생각만큼 빠르게 지나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일거다. 다들 퇴사 직후에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았다. 여유있는 여행이 가능한 유일한 시점이 퇴사 직후이기도 하겠고, 퇴사가 주는 파워풀하지만 묵직한 해방감에 여행이 주는 기분좋은 해방감을 곁들이면 극대화된 해방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그래서 제주에 다녀왔다.

동남아 같은 곳을 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멀리 떠날 이유가 없었다. 퇴사를 하고 나니까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사라져서 일종의 시발비용(?)이 사라졌다. 쓸데 없는 것을 사려고 달려드는 것도 일종의 에너지인데 이 에너지의 발원지가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하와이나 발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집을 떠나 출퇴근하던 생활이 끝났다는 걸 몸으로 알려주기만 하면 됐다.



2. 한낮의 전시 관람

회사를 다니지 않아서 가장 좋은 점은 평일 낮시간이 오롯이 나의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간을 내주는 댓가로 월급을 받아왔던 건데, 오랫동안 남에게 맡겨두어서 그런지 이 시간이 원래 내 것이었다는게 생소하다. 초등학교때부터 언제나 매일 내 손에 쥐어져있던 '꼭 해야 하는 일'이 없다는게 이상하다. 내 삶이 완전히 내 것이자 내 책임이라는 것이 충만한 안정감이 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잘 구르다가 멈춰버린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 읽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는 책이 문득 떠오른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어딘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오늘날의 시스템을 명쾌하게 풀어줬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 줄 모르고 어디가 아파도 그 원인조차 진단하지 못한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milkbiscuit.tistory.com

평일 낮의 햇살에는 비타민이 들어있는게 분명해

그래서 아무튼 평일 낮에! 동대문 ddp에서 진행중인 '우리를 매혹시킨 20세기 디자인'을 보고 왔다. 회사 다니는 중이었다면 주말에 이 복잡한 동네에 오고 싶지 않아서 결국 안 왔을 것 같은데 평일에 올 수 있으니까 너무 좋더라. 규모가 너무너무너무 작아서 실망했고, 전시라기보다는 앤더슨씨의 가구전시장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전시장은 한 칸이고, 전체 전시물이 아래 사진의 4~5배 정도다. 예쁘고 완성도있는 빈티지 가구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전시인 줄 알고 설명이나 감각적인 배치가 있을거라고 기대했던 터라 실망스럽기도 했다.



3. 한산한 오후의 카페탐방

한산한 한낮의 카페를 또 빼놓을 수 없지. 그새 이렇게 한산한 시간대에 다니는게 익숙해져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막 불편하고 그렇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내가 언제 회사를 다녔었나 싶은 요즘이다. 회사를 어떻게 다녔지? 어떻게 일주일에 5일을 8시간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지? 별것 안 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회사에서 받았던 온갖 독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간의 삶이 나에게 얼마나 유독했는지, 실시간으로 디톡스가 되는 느낌이 난다.



4. 평일엔 골프장마저 여유있다..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평일 라운딩은 주말보다 티 간격도 조금 더 긴 것 같고, 2인 라운딩이 가능한 티를 찾는 것도 조금 더 쉬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래도 골프장에는 사람이 많다. 골프치는 사람들은 일도 안 하나봐.. 일은 안 하는데 다들 돈은 많고..좋겠다(?)



5. 건강하게 먹기 위한 노력

지금까지 내 모든 밥상은 컬리에서 배달되어왔다. 퇴사하면서 조금 더 건강하게 먹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안 하던 요리를 갑자기 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이번 달에는 거의 한두 가지 재료를 볶거나 익혀서 먹는 정도에 그쳤다. 그게 어디람. 여전히 컬리가 나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긴하지만, 레토르트나 반조리식품은 거의 시키지 않는다. 시키더라도 화학조미료나 보존제 같은 게 없는 제품으로 열심히 골라서 시킨다.

옥수수수염차를 만들기 위해서 수염을 말려보는 중
밀가루 대신 머랭을 섞어서 만든 고구마빵


술을 안 마신다고 하진 않았.....



6. 슬슬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어지는 시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놀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수시로 앞으로 뭘하고 살지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 석달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쉬기로 했으니까 일단 쉰다. 잡생각을 지우는 데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플라잉타이거에 갔다가 비즈공예 박스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하지만 플라잉타이거는 아무래도 너무 꼬마공주님들을 위한 구성이라 인터넷에서 내 취향인 비즈를 찾아서 한바탕 주문했다.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7. 동생 생일 축하한다

기한없는 백수 주제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퇴사자에게는 퇴직금이 있으니까 동생에게 거나한 생일선물도 쐈다. 뭐든 잘 흘리고 묻히는 동생에게 찰떡인 아이템이 아닌가. 이거 산다고 주말에 프라이탁 매장 오픈런을 해봤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씨에도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하지만 확실히 예쁜 제품이 많기는 많았다. 인터넷에 보니까 사람들이 죄다 하와이파이브오랑 라씨만 사는 것 같아서 경쟁 터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보는 모델이 겹치지 않아서 편하게 쇼핑했다.



8. 아무튼 가장 많이 한 건 당연히 넷플릭스

엄브렐러 아카데미랑 매니페스트를 완주했다. 매니페스트는 뒤로 갈수록 같은 패턴이 반복되어서 오기로 봤는데,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초반은 지루했는데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기존의 초능력자 히어로물들의 뻔한 레퍼토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캐릭터들이 각각의 매력을 선명히 가지고 있는 것도 좋았고, 다들 연기도 엄청 잘한다.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엄브렐러 아카데미.



무지개를 봤다. 그것도 쌍무지개를. 앞으로 다 잘 될 거라고 말해주듯 너무도 선명하고 아름답던 무지개 사진으로 퇴사 한 달 기념 회고를 마친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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