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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결정부터 실행까지 7일도 채걸리지 않았다. 나도 남편도 2월부터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어서 어디라도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나마 그것이 최선인 악재 상황이라 더 그랬다. 상황상 이직이나 퇴사가 가능한 옵션이 아니기 때문에 업무가 확정되었을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다짐은 '올해는 재미없고 무료하게 보내자'였다. 그런 기운빠지는 다짐때문이었는지 여행 직전까지 무기력증때문에 앓아누울 정도로 힘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남편이 예약해둔 식당에 갔다. 정말 유명하신 분인데, 운 좋게도 홀에 우리 뿐이라 쉐프님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냥저냥 재미없게 보내겠다는 내 다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됐다. 쉐프님이 내어주시는 음식 하나 하나는 흠잡을 곳없이 균형이 잘 잡힌 훌륭한 맛이었고 또 정성스러웠다. 매일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보통의 지구력과 인내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훌륭한 음식을 하시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이렇게 훌륭한데도 쉐프님은 겸손하셨다. 자기비하나 평가절하가 아닌 진짜 겸손. 유명한 식당에서 종종 보던, 손님이 맛있다고 해주니까 형식상 내뱉는 가짜 감사도 아니었고, 니들이 뭘 알겠어 혹은 무조건 내 음식이 최고지 하는 기고만장형 태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매일의 삶에 감사하고 스시도 사시미도 잘 모르는 우리의 엄지척에도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제주라는 좋은 곳에서 식당을 하실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하고 교만했던 과거의 태도를 반성한다고도 하셨다. (이 정도 음식이면 교만하지 않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ㅋㅋ) 맛있는 음식을 찾아 고급 호텔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라면 앞으로는 차츰 더 장인들이 늘어나서 장인을 찾아가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고도 하셨다.
그저 유명세를 타는 것이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장인이 되는 것. 명예나 부는 모두 나의 밖에 있는 것이지만 장인이 된다는 것은 내 안을 가꾸는 것이다. 그래서 그 꿈이 훨씬 더 어렵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나야 완성된 한 피스를 먹고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쉐프님은 생선부터 실파며 생강, 다시마, 쌀, 유자 또 뭐 나는 알지도 못할 그 외의 무수한 식재료를 고르고 썰고 숙성하고 도구와 매장을 갈고 닦고 손님을 응대하면서 스시를 짓기까지 그 모든 사사로운 과정 하나하나에 장인으로서 임하고 계신 것이다. 대충 고른 생선으로 대충 숙성해 대충 지은 스시가 이 맛이 날리가 없다. 그러니까 장인이라는 것은 눈 앞의 사사롭고 미미한 것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것의 중요함과 감사를 알게 하고 결국은 작은 점이 무수히 찍히고서야 장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없는 일을 맡게 됐으니 대충 주어진 일이나 탈없이 흘려보내면서 재미없는 한 해를 살자는 나의 다짐은 장인 정신의 정반대에 놓인 한심한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제 내 선택권은 두 가지다. 지금 맡은 일부터 정성스럽게, 내가 배울 수 있는 면을 찾아 숙고하며 차근히 밟아가거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은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 일단은 주어진 내 일과 생활에 정성을 더해보자. 의도치 않게 새해 다짐같은 것이 생겼네. 정성스러운 삶!
쉐프님 손에 꼽을 만큼 맛있는 식사였고 그 이상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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