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끼한끼를 소중하게

양평, 프란로칼 - 제철식재료를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것

728x90
반응형

하늘이 예쁘던 주말 오후, 갑자기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큰 기대없이 캐치테이블을 돌리다가 짝꿍이 냉큼 예약을 눌러버린 곳, 그리곤 기대하라며 큰 소리를 친 곳.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에는 쉐프의 인삿말과 음식 철학에 대한 내용이 간단히 적혀있다. 쉐프님의 이름까지 박아둔 것을 보니, 엇 여기 보통이 아니겠다 싶었다. 뒷면으로 뒤집으니 메뉴가 나온다. 디너 코스는 한 종류였고, 차없이 오긴 어려운 곳이라 그런지 와인페어링은 메뉴에 없었다. 가장 위에 적힌 썸머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제 곧 어텀도 나오겠군.

가게 이름에서 드러나듯 로컬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메인 곳이다. 메뉴에도 그 코스의 주인공이 될 식재료의 이름과 조연들의 이름이 조로록 적혀있다. 그리고 순서대로 나온 음식들은 정말 계절을 고스란히, 그 식재료의 맛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페어링은 없지만 글라스가 세 종류나 준비되어있었다.

말바시아 펫낫?프로세코?로 한 잔.


아뮤즈 부쉬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가볍게 빈속을 달래며 시작한다. 마리네이드된 토마토가 맛을, 단단한듯 부드럽게 바스라진 타르트지와 얇고 바삭한 오징어먹물튀일이 식감을, 바질잎 한 장이 생동감을 준다.



아, 이 코스는 여름코스지!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메뉴. 수박슬러시베이스에 하얀건 리코타 풀은 민트잎, 꽃은 부추꽃이다. 얼음 동동띄운 동치미나 화채따윈 순한 맛이다. 내 온 몸의 온기를 빼앗긴 느낌이 들 정도로 쨍하게 시원했다.




메뉴판에 적힌 주인공은 애호박이었고 표현된 것도 애호박이 맞다. 모든 구성요소가 애호박의 무르고 부드러운 느낌을 다양한 맛으로 함께 표현해준다. 어느것하나 튀지 않고 조화롭다.

하지만 내겐 주인공인 애호박보다 노각과 백태콩 후무스가 씬스틸러로 기억되는 메뉴다. 데치기만 한 노각을 먹어볼 일이 많지 않으니 드셔보시라며 두 조각만 살짝 올렸다고 설명해주셨다. 끝 맛이 많이 쓰니까 후무스를 듬뿍 찍으라고도. 이 얼마나 제철식재료에 충실한 구성인가. 말씀해주신대로 노각은 신기하고 끝이 매우 썼지만 또 그 쓴맛이 입에 길게 남지는 않아서 좋은 경험이었다.



갑오징어가 끝물이라서 아쉽다셨고 옥수수는 당연히
초당옥수수, 바닥에 깔린 화려한 페인팅은 로메스코소스다. 이 메뉴도 원재료를 맛 볼 수 있으면서 레스토랑의 창의성이 드러나는 피스를 구성했다는게 정말 대단하다. 레스토랑의 컨셉과 지향점을 보여주면서도 실력까지 뽐낸다니.!



파스타가 나오기 전에 호밀빵과 이즈니버터를 내주신다. 파스타 닦아먹을 빵을 남겨뒀어야했는데 후처리를 하셨다는 버터의 부드러움과 호밀빵의 고소함에 취해서 걍 다 먹었다...빵도 직접 구우셨을까...?



감자가 맛있는 계절에는 생면파스타에 뇨끼를 선보이신다고 한다. 밀가루보다 감자함량이 확연히 높은지 사실 감자로만 만들었다고해도 그런가보다할 수준이다. 정말 놀라웠던 점은 감자가 정말 감자다운데도 요리에 어우러지지 못하고 튀는 느낌이 아니다. 자기주장이 강해서 주인공이 되는게 아니라 무대구성이 잘 되어서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느낌이다. 쉐프님 왜 양평에 계실까..



제철생선은 농어. 직접 기른 타임이 잎이 크게 자랐다고 이렇게 큰 타임잎은 처음본다는 귀여운 설명을 덧붙여주셨던 메뉴다. 죽순과 당근, 콩, 감자가 쫄깃하게 익은 농어살 밑에 숨어있다. 이 메뉴도 저 한조각 한조각은 정말 죽순, 정말 당근맛인데 너무도 적절한 간과 감칠맛을 지닌 브롯이 이 모두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 당근을 먹을 땐 오케스트라에서 잠깐 당근이 솔로연주를 하고 모두가 베이스를 깔아주는 것 같다가 농어를 곁들이면 다같이 와르르 쏟아져서 클라이막스를 연주해준다.



이제 슬슬 배도 부르고 더이상 어떻게 감동받나,할 때 메뉴에 없던 그라니따가 등장한다. 메인이 나오기 전에 입을 한 번 정리해주는 느낌으로 준비하셨다고 한다. 앗 이것은 이솝에서 나오는 마우스워셔와 너무도 같은 맛...! (인도커리 먹고 나올때 쯔란이랑 설탕이 있는거 아시죠? 그와 비슷한 맛입니다.) 호불호가 매우 강할 것 같아서 걱정은 됐지만, 입안 정리는 가히 최고였다. 지금까지 먹은게 뭔지 내 입이 모두 잊었다.



내가 선택한 횡성한우+1 스테이크. 제일 맛있게 막은 스테이크 타이틀을 갱신한다. 그 전까지의 메뉴들이 간이 세지 않아서 좋았는데 스테이크는 스테이크에도 간이 되어있는데 소스도 짭쪼롬해서 유일하게 간을 의식하게 된 메뉴다.



이건 짝꿍이 선택한 오리가슴살테이크. 아래 소스는 부추, 흰 조각은 참외피클, 가루는 비트가루. 내가 먹지 않아서 맛은 설명할 수 없다..



아아 정말 배부르지만 코스가 끝난 것은 아쉽군. 이제 디저트가 시작된다. 소르베는 패션후르츠, 패션후르츠의 강렬하게 치고가는 신 맛을 싫어하는데 딱 좋은 단 맛만 남기셨다. 나머지 과일들은 보이는 그대로다. 동그란 연한 초록빛은 메론, 흰 색은 그릭요거트.


기대했던 미숫가루. 미숫가루맛 아이스크림에 머랭쿠키, 현미 크럼블이 바닥에 깔린다. 머랭쿠키에 붙은 것은 튀긴 귀리다. 바삭바삭하고 아주 달달한 것이 매우 디저트답다.


이 뒤에 프렌치프레스에 담겨나온 허브차와 쁘띠디저트인 버터쿠키, 초콜렛이 있는데 미숫가루까지 먹고 나서 정신이 헤이해진 내가 그만 사진을 찍지 않았다.

와인이나 주류페어링없이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처음엔 위치를 생각하면 코스 가격이 좀 비싸다 싶었는데, 지금은 다음 계절 코스가 기대된다. 플레이팅도 무척 세련됐고, 맛에서도 조화와 변주를 모두 잡는다. 식재료 고유의 맛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완벽히 준비된 모습으로 그려낸다.

왜 양평에 계실까...? 미슐랭은 경기도는 안 가보나..?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