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것 같은 강렬한 여름 방학이다. 늘 할 일에 쫓기고 하고 싶은 것에 밀리며 방학을 보냈는데, 이번 방학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는 여유가 있다. 여름 휴가를 다녀온 뒤, 일주일은 마음 편하게 정말 '놀자'고 다짐을 하고 났더니, 막상 너무 심심하다. 뭘하면서 노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달까. 책도 반납할 겸,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가 주섬주섬 몇 권을 집었다. 장르 중에 소설을 제일 좋아하는 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손에 딱 잡히는 책이 없더라. 괜히 논문에 참고할 만한 책을 몇권 집다가, 뻬드로 빠라모를 만났다.
얇은 두께만큼 간단한 줄거리지만, 그 독특한 구조때문에 읽는 내내 안갯속을 헤매는 듯했다. 책의 시작은 후안 쁘레시아도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꼬말라의 토호인 뻬드로 빠라모의 친자식이다. 뻬드로 빠라모는 뭐든 돈으로 해결하는 악덕한이었으며, 쁘레시아도의 어머니는 그와의 삶을 견디지 못해 꼬말라를 떠났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 잘 모르는 상태로 성장했다. 쁘레시아도는 어머니의 유언때문에 아버지를 찾아 꼬말라를 찾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유령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쁘레시아도는 끝내 미친 것 같은 정신 상태에 이르러 죽고 만다. 쁘레시아도의 죽음과 함께 2막이 열리고, 땅에 묻힌 쁘레시아도는 이제 죽은 몸과 말짱한 정신으로 유령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유령들은 아직 자신들이 살아있는 양, 추억의 한장면을 늘 곱씹는다.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듯한 유령들의 이야기는 쁘레시아도가 뻬드로 빠라모의 자식이라는, 중요해보이는 사실을 잊게 한다. 뻬드로 빠라모는 수사나라는 여자를 사랑했는데, 수사나의 마음을 얻기도 전에 그녀는 정신병에 시달리다 죽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꼬말라 농민들은 삶을 견디다 못해 혁명을 일으킨다. 뻬드로 빠라모는, 꼬말라를 굶어죽게 만들기로 결심하고, 황폐해져가는 땅을 방치한 채, 수사나가 떠난 황천길을 바라보며 창문 앞 안락의자에 앉아 평생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날 그 역시 숨을 거둔다.
머릿속에 세 가지가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하나는 '신부'고 다른 하나는 '혁명', 마지막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공간'이다. 먼저, 신부는 뻬드로에게 엄마가 없는 갓난아이를 떠넘겼다. 그러면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당신의 아이이기도하고 당신에게 가면 밥은 굶지 않을 것 아니오.'라고 합리화한다. 그 아이는 자라서 강간과 살인을 일삼다가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에게 짓밟히는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신부가 고개를 돌려버린 작은 사건이 자라고 자라 그 자체가 죄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까지 죄를 짓게 만들다가 죗값을 치른 것도, 누군가의 앙갚음도 아닌 사고로 아무 의미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유령들은 신부가 자신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줄 누군가를 찾아 계속 떠돌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신부가 어떻게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었겠나. 작가는 종교의 역할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두 번째 앙금은 '혁명'이다. 부호와 권력자들을 타도하고 농민들을 위한 꼬말라를 만들고자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성사시키기 위해 뻬드로 빠라모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돈이 있으니까. 그래서 뻬드로 빠라모는 꼬말라의 대토호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수사나의 죽음과 함께 꼬말라를 굶겨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주 아주 성공적으로 그 결심을 이룬다. 꼬말라는 결국 그를 이기지 못한 셈이다. 최근의 역사에서도, 지금이 순간에도 '혁명'은 지지와 격려를 받는 존재이지만, 과연 그 결과가 '혁명'을 출발하게 한 문제를 해결하는가. 과연 '혁명'에게 그럴 힘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내 생각을 꽉 조여왔던 건, 산 자들과 죽은자들의 공간이 중첩되는 것이다. 꼬말라 유령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그들이 바로 그 땅에서 살아숨쉴 때, 겪었던 이야기다. 이건 철저하게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늘 내가 딛고 서있는 땅 위에서 누군가는 비명을, 함성을, 기쁨을 내질렀고 10년 뒤 혹은 100년 뒤,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있다. 어딘가 섬뜩하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복잡한 실랑이가 머릿속에 꿈틀댄다. 책을 덮은 뒤로도 며칠째, 나는 어딘가를 지날 때마다 10년 전 이 곳의 모습, 100년 전 이 곳의 모습이 어땠을까 상상한다.
얼마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여행을 다녀왔다. 미술사박물관에서인가 19세기 말 작품중에 복권을 산 소녀를 그린 작품이 있었다. 복권에 작은 희망을 걸고 자신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던, 이제는 없는 소녀. 삶이란, 인생이란 한 껏 흩날리다 사라지는 물안개같은 걸까. 영원한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죄'의 문제,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들겠다고 피와 땀을 쏟아붓는 '혁명'도 다 과거가 되고 죽은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시간이란, 삶이란, 인생이란 두텁게 뭉쳤다가도 흩날려버리는 물안개같은걸까. 안갯속 검은 수묵화같은 이 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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